1945년 11월 중국 상하이. <br /> <br />김구 선생을 환영하는 인파 속에 한 무리의 여성들이 눈에 띕니다. <br /> <br />여성들 머리 위로 간판이 하나 보이는데 '한국 부녀공제회'라고 적혀 있습니다. <br /> <br />당시 상하이 유일의 한국인 위안부 피해자 구호단체로 알려진 곳입니다. <br /> <br />단체를 만든 사람은 '공돈'이라는 이름의 교포였습니다. <br /> <br />공돈은 자기 집을 보호소로 만들어 여성들을 돌보고 사비까지 털었다고 말했습니다. <br /> <br />'상하이 교포가 조선 여성들을 구제했다.'는 극찬이 여기저기서 쏟아졌습니다. <br /> <br />그야말로 난세에 등장한 의인이 따로 없었습니다. <br /> <br />그런데 지난 2002년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납니다. <br /> <br />상하이 지역 위안소 운영자 명단에서 공돈의 이름이 발견된 겁니다. <br /> <br />상하이시 무창로 336호. <br /> <br />규모도 상당히 컸던 것으로 전해집니다. <br /> <br />중일전쟁 직후 상하이로 건너온 공돈은 이름도 일본식으로 바꾸고 5년 넘게 위안부 피해 여성들을 착취해 돈을 벌었습니다. <br /> <br />그러다가 해방이 되자 두 달 만에 위안부 보호와 갱생을 내 건 구호단체의 창설자로 변신한 겁니다. <br /> <br />[장석흥 / 국민대 한국역사학과 교수 : 그 사람들은 진짜 교활하다고 할까요. 일제 식민지 시기 자기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서 애국적인 모습으로 둔갑하는 경우가 많아요.] <br /> <br />공돈이 부녀공제회를 만들어 금전적 이득을 취하려 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. <br /> <br />단체 활동비로 중국 정부에 청구한 돈이 당시 돈으로 수천만 원에 이르는데, 구체적인 지출 기록은 남기지 않았습니다. <br /> <br />[김대월 / 나눔의 집 학예연구사 : 위안부 피해자들을 내가 수용하니까 예산 달라, 실제로는 막대한 예산을 탔거든요. 경제적인 측면과 자기 변신해야 하는 그 두 가지가 필요충분조건이 맞지 않았나….] <br /> <br />다섯 달 짧은 활동을 끝으로 공돈은 위안부 피해 여성들을 남겨두고 홀로 귀국한 뒤 자취를 감췄습니다. <br /> <br />지탄받아야 할 파렴치한 일본의 만행 뒤에는 시대에 무릎 꿇고 개인의 영화만 좇은 부끄러운 자화상들이 숨어있습니다. <br /> <br />취재기자ㅣ차유정 <br />촬영기자ㅣ이승준, 박재상 <br />자막뉴스ㅣ류청희 에디터<br /><br />▶ 기사 원문 : https://www.ytn.co.kr/_ln/0103_201908160934462175<br />▶ 제보 안내 : http://goo.gl/gEvsAL, 모바일앱, 8585@ytn.co.kr, #2424<br /><br />▣ YTN 데일리모션 채널 구독 : http://goo.gl/oXJWJs<br /><br />[ 한국 뉴스 채널 와이티엔 / Korea News Channel YTN ]